[월드컵] 뚝심의 벤투와 함께한 4년…태극전사도, 한국축구도 자랐다
(도하=연합뉴스) 안홍석 기자 = 파울루 벤투(53·포르투갈) 감독이 이끈 한국 축구대표팀이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에서 브라질에 1-4로 대패하며 대회 일정을 마쳤다.
조별리그 H조 최종전에서 포르투갈을 꺾는 ‘알라이얀의 기적’으로 12년 만의 16강 진출을 일궈낸 태극전사들은 ‘세계랭킹 1위’ 브라질을 상대로 전반에만 4골이나 내주고 3점 차로 져 다소 실망스럽게 도전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16강 탈락의 고배를 마신 대표팀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상 두 번째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의 목표가 이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벤투호가 공격 축구를 펼치며 당당하게 세계 강호들에 맞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6강 진출의 성과까지 냈기 때문이다.
가나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대표팀은 2-3으로 졌지만, 먼저 2골을 내주고도 조규성(전북)의 멀티골로 한때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한국은 우루과이에 다득점에서 앞서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결과적으로 가나전의 2골이 16강 진출에 결정적이었다.
포르투갈과 3차전에서는 전반 5분 만에 첫 실점 하고서 22분 뒤 동점골을 넣었다.
이후 상대를 골문을 끊임없이 두드린 끝에 후반 추가시간 황희찬(울버햄프턴)의 역전 결승골로 16강행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전까지 한국 축구는 월드컵에서 무게중심을 ‘뒤’에 뒀다. 잔뜩 웅크린 채 역습을 노리는 게 강팀을 상대하는 당연한 전술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실패한 대회가 바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다.
당시 한국은 소극적인 전술로 일관하다가 손흥민(토트넘)이라는 걸출한 공격수를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스웨덴과 1차전, 멕시코와 2차전에서 2연패를 떠안았다.
3차전에서 독일을 꺾는 큰일을 해냈으나, 이미 16강 진출 가능성은 희박해진 뒤였다.
대한축구협회의 벤투 감독 선임은 주도하지 않고 대응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축구로는 더는 월드컵 무대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는 문제의식의 결과였다.
2018년 8월 지휘봉을 잡은 벤투 감독은 패스워크를 바탕으로 공 점유율을 높이며 경기를 주도하는, 이른바 ‘빌드업 축구’를 대표팀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자신의 데뷔전인 코스타리카와 평가전에서부터 자신의 축구 색깔을 뚜렷하게 보여줬고, 이러한 전술적 틀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
약팀을 상대로 치른 월드컵 2차 예선 경기에서도, 본선 직전 강팀을 스파링 파트너 삼아 치른 평가전에서도 ‘벤투표 축구’는 변함없이 이어졌다.
대표팀의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위기는 계속 찾아왔다.
19년 만의 우승 기회로 여겨진 2019 아시안컵에서 개최국 카타르에 일격을 당해 8강에서 탈락했을 때 잠깐 벤투 감독을 경질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2019년 10~11월 북한과 레바논을 상대로 치른 월드컵 2차 예선 경기에서 잇따라 0-0 무승부에 그쳤을 때도 벤투호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지난해 3월 한일전에서 0-3 참패를 당한 것은 벤투 감독에게 치명타나 마찬가지였다.
약팀을 상대로도 가끔 흔들리곤 하는 벤투호의 빌드업 축구가 과연 세계적인 강호들과 겨뤄야 하는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통할지 많은 팬과 축구인들이 의심했다.
전문가는 물론 팬들도 매 경기 선발 라인업을 대부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선발 명단에 변화를 안 주는 점도 도마에 자주 올랐다.
하지만 일관된 전술 속에서 ‘벤투표 축구’는 완성도를 높여갔다.
과감한 패스가 강점인 황인범(올림피아코스)과 안정적으로 볼을 배급하는 정우영(알사드)의 중원 조합이 잘 자리 잡으면서 너무 느리다는 지적을 받던 공격 전개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면면에 큰 변화가 없어 서로를 잘 아는 선수들의 패스 플레이는 점점 더 유기적인 흐름을 보였다.
벤투호는 준비한 축구를 카타르에서 마음껏 펼쳐 보이며 ‘월드컵에서는 선수비 후역습을 해야 한다’는 한국 축구의 고정관념을 보기 좋게 깨부쉈다.
지난 4년 동안 ‘고집쟁이’ 벤투 감독과 함께하면서 한국 축구는 많은 것을 배웠다.
벤투 감독의 지도 아래 태극전사들은 월드컵에서도 경기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진영이 아닌 중원에서 상대와 당당하게 맞부딪쳐도 두려울 게 없다는 것을, 우리도 강팀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또 실제로 경험했다.
축구협회와 팬들은 더 큰 것을 배웠다. 우리도 한 감독에게 4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인내의 과실이 달다는 점도 깨달았다.
벤투 감독과 한국 축구의 동행은 카타르 월드컵으로 종료됐다.
축구협회는 곧 한국 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더 높여줄 최적의 ‘차기 사령탑’을 선임하는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